[율곡로] 한국 축구 최대 숙적은 경우의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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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인한 야성 내뿜던 '2002 태극전사'를 추억하며

    (서울=연합뉴스) 이승우 선임기자 = 경우의 수(Number of Cases)는 수학이나 확률론에서 쓰이는 말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가짓수를 모두 세어 숫자로 표시한 것을 뜻한다. 머리 아프게 수학 용어를 꺼낸 건 사실 축구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우리 국민들은 이 용어를 수학 시간보다 축구 중계방송에서 더 많이 들어왔던 게 사실이다. 특히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 때마다 축구 팬들은 경우의 수라는 단어를 신물이 날 만큼 마주쳐야 했다.

    한국, 32강 자력진출 실패
    한국, 32강 자력진출 실패

    (몬테레이=연합뉴스) 신준희 기자 =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손흥민 등 선수들이 24일(현지시간) 멕시코 몬테레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A조 3차전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경기에서 0대1로 패배한 뒤 아쉬워하고 있다. 2026.6.25 [email protected]

    우리가 축구에서 이 용어를 쓸 때 실질적 의미는 우리 대표팀이 월드컵 조별 리그를 통과해 다음 단계로 올라가고자 충족해야 할 조건을 말한다. 자력으로 진출할 가짓수를 못 만들었을 경우 우리 팀과 경쟁팀들의 현재 성적표를 비교하고 향후 최소한 어떤 결과를 내야만 탈락하지 않을지 계산해야 한다. 대표팀 당사자만큼이나 축구 팬들에게도 초조한 희망 고문의 시간이다.

    이번 북중미 월드컵에서도 한국 대표팀은 어김 없이 경우의 수와 싸웠다. 역대 대표팀 가운데 해외파 빅리거가 가장 많아 기대가 컸지만, 경우의 수 유령은 여전히 우리 곁을 맴돌았다. 체코와 첫 경기에 승리할 때만 해도 이번엔 홀가분하게 32강에 선착하나 했다. 그러나 멕시코 전에 이어 최약체로 분류됐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전에서도 패하면서 또다시 경우의 수에 목을 매야 했다.

    우리 대표팀과 팬들은 조별 리그를 마친 뒤 다른 조에 속한 팀들의 경기 결과를 지켜보며 계산기를 두드려야 했다. 생전 응원하지 않았던 일본, 이집트, 이라크, 가나 등의 경기를 지켜보며 이들 나라의 승리를 빌고 경우의 수를 끊임없이 계산했다. 우리 팀의 생사가 걸린 이득을 다른 나라에 구걸하는 것 같다고 해서 '구걸 축구'라는 조롱까지 나왔다. 처음엔 경우의 수 9개 중 3개만 실현돼도 32강에 오르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결말은 허무했다. '강적' 경우의 수 선수는 펠레와 마라도나 뺨치는 발재간으로 이 높은 확률을 모두 제치고 한국을 탈락시켰다.

    오죽하면 한국 축구의 최대 숙적은 전통의 유럽과 남미 강호나 이웃 일본 등이 아닌 '경우의 수'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지경이 됐다. 우리 축구 팬들은 언제까지 경우의 수 계산에서 해방돼 온전히 경기를 즐길 수 있을까. 그러려면 우리 대표팀이 압도적 경기력으로 대회 초반부터 충분한 승점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을 텐데, 그런 기대엔 여전히 못 미치는 현실이다. 세계 축구의 발전 속도는 언제나 우리 성장보다 빨라 보인다.

    '이런'(몬테레이=연합뉴스) 신준희 기자 =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홍명보 감독이 24일(현지시간) 멕시코 몬테레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A조 3차전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경기에서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다. 2026.6.25 hama@yna.co.kr

    '이런'(몬테레이=연합뉴스) 신준희 기자 =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홍명보 감독이 24일(현지시간) 멕시코 몬테레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6 북중미 월드컵 A조 3차전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경기에서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다. 2026.6.25 [email protected]

    경우의 수를 잊고 가장 마음 편히 월드컵 조별리그를 봤던 시절은 우리가 일본과 공동 주최했던 2002년 월드컵이다. 첫 상대 폴란드를 완파하고 미국과 두 번째 경기에서 비기면서 16강 진출을 거의 확정했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강호 포르투갈마저 꺾으며 경우의 수라는 단어를 들어볼 틈이 없었던 건 '홈 어드밴티지' 덕분만은 아니었다. 이후 이탈리아, 스페인을 잇달아 꺾고 4강까지 오를 만큼 탄탄한 전력을 입증했으니 말이다. 강인한 체력과 불굴의 정신력을 내뿜으며 그라운드를 누비던 2002년 태극 전사가 그립다.

    당시 필자는 조별 리그 절반이 열린 일본에서 결승전까지 대회 내내 현장 취재를 했다. 요코하마에 베이스캠프를 차린 지 일주일가량 지난 어느 날 숙소에 돌아와 TV를 켰다가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뉴스에서 보여주는 서울시청 앞 광장 모습이 너무 낯설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전쟁이라도 난 줄 알았다. 광장 전체가 붉은색으로 채워진 채 환호성으로 들끓는 광경을 타국에서 지켜본 경험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당시 우리 국민이 공유했던 경험과 정서는 긍정적인 '집단기억'으로 DNA에 각인돼 남아있다.

    포옹하는 히딩크 감독과 박지성
    포옹하는 히딩크 감독과 박지성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 D조 한국-포르투갈 전에서 박지성이 골을 넣은 뒤 히딩크 대표팀 감독과 포옹하는 모습
    2002.6.14 (인천=연합뉴스) 특별취재단 <저작권자 ⓒ 2002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그 2002년을 기점으로 우리 국민의 눈은 한참 높아졌다. 하지만 한국 축구는 24년 전의 비약적 발전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오히려 전체적으로 퇴보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번 대회 부진을 두고도 단조로운 전술 운용, 투지와 절실함의 실종, 손흥민 활용법 실패 등 여러 분석이 나온다. 이를 반성하고 보완할 책임은 선수와 지도자들의 몫이다. 다만 축구 팬들은 다시는 경우의 수에 끌려다니지 않을 강인한 태극 전사가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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