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낭만 사라진 교실…'다크 장르' 더해 서늘해진 K-학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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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고'·'지우학' 등 잇단 흥행…학교서 펼쳐지는 잔혹 서바이벌
학교, 생존 경쟁·계급 갈등 공간으로…"공교육 붕괴와 사회적 모순 투영"
(서울=연합뉴스) 조윤희 기자 = 고등학생들의 스마트폰 화면 속 소원을 들어주는 앱 '기리고'가 숨 막히는 저주와 날 선 의심을 부르고, 매일 일상을 공유하던 친구들은 잔혹한 생존 경쟁에 내몰린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의 첫 영 어덜트(YA) 호러 장르 오컬트 학원물 '기리고'가 공개 3일 만에 비영어 TV 쇼 부문 4위에 오른 데 이어, 공개 2주차에 글로벌 1위를 차지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과거 대중문화 속 학교는 푸른 청춘들의 성장과 낭만, 풋풋한 로맨스가 피어나던 따뜻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스릴러·호러·오컬트 등 '다크 장르'와 결합한 최근 K-학원물은 한층 서늘하고 잔혹한 흐름으로 학교 풍경을 바꾸고 있다.
글로벌 흥행작으로 우뚝 선 '기리고'는 앱에 깃든 저주를 피하려는 고등학생 5인방을 통해 10대들의 처절하고 불안한 심리를 감각적으로 그려내 호평받았다.
학교라는 폐쇄적인 공간 속 잔혹한 생존 경쟁은 비단 이 작품에서뿐만이 아니다.
학급 내 투표로 '왕따'를 정하는 잔혹한 서바이벌을 그린 '피라미드 게임',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학교에서 구조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를 담은 '지금 우리 학교는'(이하 '지우학')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더해 부와 권력에 따라 철저하게 계급이 나뉜 사립고등학교의 계급 전쟁을 다룬 '하이라키'·'청담국제고등학교'까지 다양한 변주를 준 작품들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을 통해 시청자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학원물의 변화가 단순한 극적 상상력을 넘어 무너진 공교육 환경과 살벌한 무한 경쟁이라는 한국 사회의 씁쓸한 민낯을 반영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과거 학교가 '성장과 낭만의 공간'으로 그려졌다면, 실제 현실에서 학교는 1%의 학생 외에는 모두 낙오자나 병풍으로 만드는 살벌한 경쟁의 현장"이라며 "공교육의 붕괴 현상 속에서 10대들이 느끼는 소외와 서바이벌이라는 존재적 위기 코드를 장르물들이 핍진성 있게 건드려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 역시 "요즘 학교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우리 경쟁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다"며 "학교라는 공간 내부에 존재하는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사이의 권력관계를 통해 사회적 부조리와 인간의 모순을 은유적이고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축소판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잔혹 학원물이 성인 시청자들에게까지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 평론가는 "학교는 젊은 층에게 즉각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졸업한 성인들에게는 과거의 경험을 환기하는 공간"이라며 "누구나 겪었던 학교라는 폐쇄적 공간 속 폭력과 권력관계가 성인들이 사회에서 겪는 부조리한 경험과 맞물리며 전 세대에 공감대를 형성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현대 사회가 급격히 파편화되면서 역설적으로 학교라는 공간이 가진 '밀집된 대면성'이 공포의 극대화를 가져온다고 분석했다.
김 평론가는 "갈수록 우리 사회가 비대면화되는 구조를 갖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대면 경험과 밀접한 사회적 관계를 맺는 유일무이한 공간이 바로 지금의 학교, 특히 고등학교"라며 "고등학교 이후에는 이토록 촘촘하고 밀집된 관계성을 갖기 힘들기 때문에, 집단적인 관계성 속에서 오는 소외의 공포 측면들을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학교를 배경으로 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이고 무서운 '집단 속 외로움과 공포'가 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가장 극대화돼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지우학' 시즌2와 '스터디그룹' 시즌2 등 후속 학원물들이 줄지어 공개를 기다리는 가운데, 이들 작품이 단순한 '도파민 자극 복제극'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질적인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온다.
김 평론가는 "최근 학원물들이 학교의 어두운 면만 천편일률적으로 다루다 보니 장르적 변별성이 떨어지고 있다"며 "K-학원물이 지속 가능한 하나의 주류 장르로 안착하려면 네거티브한 고발에만 머무르기보다 학교가 가진 다양한 면모와 인간적인 따뜻한 서사까지 아우르는 확장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