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저도 자본과 결혼…타인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을까 질문"(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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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심사위원대상 '가능한 사랑'…"해고·계급 갈등·인간 윤리 얽힌 이야기"
이 감독 "타인의 고통 재료로 소비하지 않을 방법, 평생 고민해"
설경구-전도연, 조인성-조여정, 다른 환경의 부부 연기…"돈과 계급, 사람의 가치 앗아갈 수도"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이창동 감독이 21일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영화 '가능한 사랑' 시사회·기자간담회에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은사자상' 트로피를 들고 있다. 2026.9.21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정래원 기자 = "해고 노동자 이야기 같기도 하고, 계급 간 갈등이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윤리에 관한 문제 같기도 하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이창동 감독은 21일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신작 '가능한 사랑'의 입체적인 면을 소개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여러 복잡한 모습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관객들과 이야기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넷플릭스 영화 '가능한 사랑'은 해고 노동자 호석(설경구)과 아내 미옥(전도연), 이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와 남편 상우(조인성) 등 서로 다른 환경에 놓인 두 부부의 이야기를 담았다.
제83회 베네치아(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가장 먼저 전 세계 관객들을 만났고, 은사자상인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이 감독이 베네치아영화제에서 수상한 건 2002년 '오아시스'로 감독상(은사자상)을 받은 이후 24년 만이다.
트로피를 품에 안고 금의환향한 이 감독은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면서도 "상보다 이 영화가 처음 세상에 나와 관객들과 만났을 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가 훨씬 중요했다"고 말했다.
그는 "쉽고 자극적인 영화가 아닌데도 관객들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과 이야기하려는 바를 느끼고 반응해주는 것이 표정과 태도에서 느껴져 정말 다행이고 기뻤다"고 떠올렸다.
이 감독은 10여년 전 대기업의 대량 해고와 파업, 강제 진압 사건을 접한 뒤 큰 충격을 받은 일을 계기로 '가능한 사랑'을 구상했다. 다만 구상 초기엔 한 차례 영화화를 포기했다고 한다.
그는 "과연 그 이야기를 정직하게 할 자격이 있는지, 제가 그들(해고노동자)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확신이 없어서 접었다"며 "시간이 지나 노동에 대한 시각 자체가 바뀌는 시점에 (시나리오에) 다큐멘터리 감독 부부의 이야기가 들어오면서 영화로 만들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이창동 감독이 21일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영화 '가능한 사랑' 시사회·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6.9.21 [email protected]
극 중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는 파업 동료의 빈소에서 벌어지는 난장판이나 억눌린 울분을 터뜨리는 순간 등 당사자들이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모습까지 카메라에 담는다.
이 감독은 예지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영화의 재료로 사용하는 일에 대한 자신의 고민을 담았다고 한다.
그는 "타인의 삶을 그리는 창작자에게는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그들로서 할 수 있을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며 "그들의 고통을 소비하거나 영화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 사용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평생 해온 질문이고 지금도 쉽게 답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이어 "(예지를 통해)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의 윤리적 문제, 태도의 문제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영화 속에 해고 노동자 가족들이 참여한 심리치료 과정이 비교적 길고 자세하게 등장하는 것도 이런 고민의 결과였다.
이 감독은 "일을 잃어버림으로써 정체성을 상실한 것 같고, 마음속에 텅 빈 자아를 느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들려주고 싶었다"며 "영화적 문법으로 보면 그 장면이 굉장히 길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실제 다큐멘터리처럼 전달하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예지가 부유한 남편 상우의 자본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것처럼 영화감독인 자신 역시 자본의 도움 없이 작품을 만들기 어렵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영화감독으로서 어떻게 보면 저도 자본과 결혼하고 사는 삶인지도 모른다"며 "특히 자본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는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영화 창작자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이어 "그 속에서도 남의 고통을 탐하거나 착취하지 않고 (타인을) 진실로 사랑하려는 마음,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서울=연합뉴스) 강민지 기자 = 배우 조인성(왼쪽부터), 조여정, 이창동 감독, 설경구가 21일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영화 '가능한 사랑' 시사회·기자간담회에서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6.9.21 [email protected]
함께 자리한 배우들은 서로 다른 환경에 놓인 두 부부를 연기하며 각 인물이 돈과 계급에 영향을 받는 방식을 고민했다고 말했다.
설경구는 해고된 호석에 대해 "자아가 완전히 깨진 상태에서 수치심과 죄책감, 분노, 열등감 등 복합적인 감정을 가졌을 것"이라며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상우 부부를 만나면서 느끼는 위축감과 거부감을 염두에 뒀다고 설명했다.
연극 '벚꽃동산'의 해외 공연으로 화상을 통해 간담회에 참석한 전도연은 "돈과 계급은 사람의 가치관을 무너뜨리고 그 사람의 가치를 앗아갈 수도 있다"며 "미옥은 그로부터 자신의 가치와 가족을 지켜내려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이 감독은 전도연·설경구와 각각 '밀양'(2007), '박하사탕'(2000)·'오아시스'(2002) 이후 오랜만에 다시 작업한 현장에 대해 "예전에는 뭔가를 해내야 하고, 완벽해져야 한다는 생각에 감독과 배우 사이에도 긴장감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굉장히 편했고 마음을 많이 놨다"고 돌아봤다.
상우와 예지 부부는 호석과 미옥 부부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풍족하지만, 각자의 욕망과 결핍을 가진 다층적 인물들로 그려진다. 이 감독과 처음으로 작업하는 조인성, 조여정이 상우-예지 부부를 연기했다.
조인성은 상우에 대해 "어떤 면에서는 친절하지만, 이면에는 무서운 독을 가진 인물"이라며 "갖지 말아야 할 것을 갖겠다는 욕망이 드러나는 순간 무서워지는 사람"이라고 했다.
조여정은 경제적 안정을 위해 상우와 결혼한 예지가 호석과 미옥을 만나면서 "충만한 삶이나 관계가 경제적인 안정감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가능한 사랑'은 오는 23일 일부 극장에서 개봉해 스크린을 통해 먼저 관객을 만나고, 넷플릭스에서 11월 6일 공개된다.
이 감독은 "영화가 만들어져도 결국 완성하는 것은 관객"이라며 "'가능한 사랑'이 관객을 만나면서 힘 있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