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선 감각과 번뜩이는 재치…온몸으로 화합 외친 데이비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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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밴드 토킹 헤즈 리더 출신 뮤지션…데뷔 49년 만에 첫 내한 공연
댄서·밴드와 주황 수트 맞춰 입고 군무…"사랑과 친절도 저항의 한 형태"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원스 인 어 라이프타임, 워터 플로잉 언더그라운드∼."(Once in a lifetime, water flowing underground)
선명한 주황색 의상을 입은 미국 유명 밴드 토킹 헤즈의 리더 출신 데이비드 번(74)이 대표곡 '원스 인 어 라이프타임'(Once in a Lifetime)을 힘 있게 부르자 장내에서 우렁찬 떼창이 터져 나왔다.
핸드 마이크 대신 K팝 아이돌처럼 헤드 마이크를 착용한 그는 두 팔과 온몸으로 퍼포먼스를 펼쳤고, 같은 주황색 의상을 맞춰 입은 밴드와 댄서들은 일사불란하게 그를 뒤따르며 합을 맞췄다.
평평한 무대 위에서 뭉쳤다가 흩어지고, 마칭 밴드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행진하던 이들은 마지막 소절에서 방방 뛰며 장내의 분위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비장한 톤으로 '제가 옳습니까? 아니면 틀렸습니까?…오 이런, 제가 무엇을 저지른 것입니까?'라며 삶을 되돌아보는 가사를 외치는 번은 마치 설교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번이 지난 21일 서울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데뷔 49년 만에 첫 내한 공연을 열고 한국 팬들을 만났다.
그는 철학적 노랫말, 이국적인 멜로디, 감각적인 LED 영상 등을 약 1시간 45분에 걸쳐 물 흐르듯 선보이며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무뎌지지 않은 날 선 감각과 번뜩이는 재치를 과시했다.
특히 자신을 비롯해 모든 밴드 멤버가 같은 색깔의 옷을 입고 악기와 마이크를 무선으로 연결한 채 무대를 누비는 모습은 전위적인 행위 예술을 연상케 했다. 개인적 서사에서 유래한 노랫말, 선율, 퍼포먼스, 강렬한 시각 효과 등이 촘촘하게 맞물리면서 마치 한 편의 뮤지컬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번은 1977년 토킹 헤즈로 데뷔해 1980년 4집 '리메인 인 라이트'(Remain in Light)로 아프리카 음악의 영향을 받은 신선한 사운드를 들려줬고, 이 앨범 수록곡 '원스 인 어 라이프타임' 뮤직비디오에서 어색한 자세로 걷는 인상적인 춤은 40여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아이코닉한 장면으로 남았다.
그는 이 밖에도 반세기에 걸쳐 밴드·솔로 음악은 물론 영화, 뮤지컬, 글쓰기, 시각 예술을 오가며 예리한 창작 역량을 드러내 왔다.
최신 정규앨범 '후 이즈 더 스카이?'(Who Is The Sky?) 발매 계기 월드투어의 하나로 열린 이번 내한 공연은 번의 이 같은 예술 세계를 응축해 무대 위로 옮겨 놓은 자리였다.
'헤븐'(Heaven)으로 공연의 막을 올린 번은 '에브리보디 래프스'(Everybody Laughs), '앤드 쉬 워즈'(And She Was), '스트레인지 오버톤스'(Strange Overtones), '하우스 인 모션'(House in Motion) 등 토킹 헤즈와 솔로곡을 아우르는 레퍼토리를 올렸다.
번은 음악과 춤을 아우른 감각적인 공연을 통해 화합과 연대라는 메시지를 시종일관 강조했다. 70대 중반의 그가 쩌렁쩌렁한 보컬을 내지르고, 온몸으로 퍼포먼스를 소화하는 모습은 진정성을 더했다.
특히 자신이 공연의 주인공이면서도 때로는 연주자나 댄서를 중심부에 배치하고, 자신은 옆이나 뒤로 빠짐으로써 화합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구현해냈다.
번은 사랑의 본질을 파고든 '왓 이즈 더 리즌 포 잇?'(What Is the Reason for It?), 디저트처럼 작고 평범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부처를 노래한 '아이 멧 더 붓다 앳 어 다운타운 파티'(I Met The Budda at a Downtown Party), 안락한 집을 친구에 비유한 '마이 아파트먼트 이즈 마이 프렌드'(My Apartment Is My Friend) 등 내밀한 서사가 돋보이는 곡들로 이야기꾼의 면모를 드러냈다.
번 특유의 풍자와 해학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인종과 젠더는 물론, 생물종(種)이 달라도 우리는 이 지구에서 평등하다는 또렷한 메시지가 감각적으로 전해져왔다.
그는 LED 전광판에 햄버거 브랜드의 로고를 패러디한 '노 킹스'(NO KINGS)라는 그래픽을 띄워 미국의 정치 상황을 풍자했고, 유명 정치 구호를 뒤튼 '메이크 아메리카 게이 어게인'(Make America Gay Again)이라는 문구로 다양성을 지지했다.
또한 '라이크 휴먼스 두'(Like Humans Do) 무대에서는 춤추고 노래하는 멤버들과 동일한 동작을 하는 동물들의 영상을 LED 전광판에 투사해 '동물과 인간은 다르지 않다'는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표출했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사이코 킬러'(Psycho Killer), '라이프 듀링 워타임'(Life During Wartime), '원스 인 어 라이프타임' 등 토킹 헤즈의 대표곡이 몰아치는 구간이었다.
관객들은 일제히 일어나 약속이라도 한 듯 박수와 떼창으로 호응했고, 고조되는 분위기에 맞춰 박수의 속도와 심박도 함께 빨라졌다. 유쾌한 멜로디를 따라 두 팔을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 관객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번은 이날 공연 도중 "사랑과 친절은 저항의 한 형태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무대와 무대 사이에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라며 고개를 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이후 미국, 멕시코, 영국 등지에서 투어를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