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분투칼럼] 아프리카 알고보면(18) 요루바 왕국에 간 조선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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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지리아 여성 감독이 만든 '토종 한류' 영화 '내 왕자님은 외계인'

    이은별 한동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조교수

    이은별 교수
    이은별 교수

    [이은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 편집자 주 = 연합뉴스 글로벌문화교류단이 국내 주요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조선의 세자 한산이 서아프리카 요루바 왕국의 아라로미(Araromi) 마을에 사신을 이끌고 행차한다. 이방인의 낯선 옷차림과 언어에 경계심을 드러내던 주민들은 오해와 충돌 끝에 이들과 마주한다. 그리고 서로의 다름이 서로 간 이해로 전환되는 순간에는 한국어, 영어와 요루바어가 혼재한 주제가 'Ife Okan Mi'(내 마음의 사랑)가 흘러나온다. 이는 지난 4월 26일 유튜브에 공개된 나이지리아 여성 감독 케미 이쿠시둔(Kemi Ikuseedun)이 제작한 신작 'My Alien Lover'(내 왕자님은 외계인)의 한 장면이다.

    2024년 전작 'My Sunshine'(나의 햇살)으로 '한국 드라마 문법을 적용한 최초의 나이지리아 영화'라 평가받은 감독이 이번에는 조선과 요루바라는 양국의 전통을 끌어왔다. 만남과 갈등, 그리고 화해로 이어지는 서사는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상호 수용해 나가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 흥미로운 대목은 바로 한국과 나이지리아 사이에 이렇다 할 미디어 협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케미 감독이 전작 이후 2년 만에 내놓은 작품이라는 점이다.

    케미 이쿠시둔 감독 영화 '나의 햇살'(왼쪽)과 '내 왕자님은 외계인'. 한글 제목을 병기한 영화 포스터 [제작사 켐즈마마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케미 이쿠시둔 감독 영화 '나의 햇살'(왼쪽)과 '내 왕자님은 외계인'. 한글 제목을 병기한 영화 포스터 [제작사 켐즈마마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지난 6월 진행한 서면 인터뷰에서 이쿠시둔 감독은 "글로벌 시청자들은 이미 K-팝과 K-드라마를 잘 안다"고 말했다. 이어 "두 문화의 '뿌리'를 보여주고 싶었다"며 두 번째 작품에 조선의 왕자를 등장시킨 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이질적인 두 문화가 만나 감정이 고조되는 길목마다 음악을 배치하는 한국 드라마 특유의 연출 문법을 끌어왔다. 이에 대한 폭발적인 반응은 댓글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학교 로맨스물이던 전작보다 한국적인 요소인 전통 의복과 경어체가 두드러지기에 이번에는 한국 배우를 캐스팅했다. 한국어에 능통한 나이지리아인 아도라가 극중 통역가로 출연하는 동시에 전체 한국어 대본을 맡았다. 캐스팅의 기준은 화려한 배우 경력이 아니라 다른 언어와 문화를 '배우려는 의지'였다고 감독은 말했다.

    한국인 출연진은 나이지리아 한국 커뮤니티의 도움을 받았다. 이는 거대 자본이나 공적 지원 없이 오직 민간 후원과 한-나이지리아 연결고리를 만드는데 의기투합한 이들의 성과라 할 수 있다. 영화를 상영관이나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아닌 유튜브에 무료 공개한 것도 두드러진다.(지난 10일 현재 조회수는 127만회에 달한다) 변화하는 놀리우드 생태계와 글로벌 콘텐츠 수용 행태를 반영한 선택이다.

    '내 왕자님은 외계인' 촬영 현장
    '내 왕자님은 외계인' 촬영 현장

    영화 속 통역사인 동시에 한국어 대본을 맡은 제작진인 아도라(가운데). 그녀가 착용한 'KOREA'가 새겨진 상의가 눈에 띈다.[케미 이쿠시둔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필자는 미디어학자로서 이쿠시둔 감독의 콘텐츠 기획·제작·유통 방식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이번 작품에 나타난 한국적 코드는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는다. 요루바의 사회·문화적 토대 위에서 새롭게 재배열된 '문화 혼종성'(Cultural hybridity)의 사례다. 두 문화가 만나는 경계에서 어느 쪽도 고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제3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내 왕자님은 외계인'은 이른바 '제3의 공간'인 것이다.

    세 개의 언어가 하나의 주제곡을 채우는 방식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한류가 더 이상 글로벌 수용자들에게 '소비'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지에서 직접 '재창작'되는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진정한 소프트파워란 상대국에 일방적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들이 자신의 언어로 되받아 써낼 때 비로소 완성된다. 아무런 지원 없이 한국 문화를 자신의 목소리로 재해석해 낸 나이지리아 여성 감독은 이를 증명해 낸 셈이다.

    촬영을 위해 전통 복식을 착용한 요루바 왕과 조선 사신
    촬영을 위해 전통 복식을 착용한 요루바 왕과 조선 사신

    [케미 이쿠시둔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2026년 1학기 필자가 맡은 미디어 특강 강의에서 이미 관련 논의가 오갔다. 수강생이었던 말라위 유학생 케니는 이 영화가 K-드라마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아프리카 특유의 유희적 감각을 더했다고 평가했다. 함께 영화를 본 남아공, 르완다, 에티오피아 친구들도 호평이었다고 전했다. 이쿠시둔 감독이 쏘아 올린 공이 나이지리아를 넘어 아프리카 대륙 전체로, 그리고 말라위 청년의 목소리로 한국의 한 대학 강의실로 날아든 것이다. 덕분에 다른 한국인 학생들도 생경한 나이지리아의 미디어 시장에서 자생하는 한국 문화 코드를 관찰할 수 있었다.

    미디어 특강에서 발표하고 있는 아프리카 학생
    미디어 특강에서 발표하고 있는 아프리카 학생

    '내 왕자님은 외계인'의 글로벌 수용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말라위 학생 케니 [이은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하지만 정작 한국과 나이지리아의 공식적인 협력은 디지털 경제·보건의료·새마을운동 등 공적개발원조(ODA)의 기본적인 사업에 머물러있다. 모두 필수적인 사업이지만, 아프리카를 '원조의 수혜자'로 보는 오래된 시선이 깔려 나이지리아의 특수성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젊은 대륙인 아프리카를 강조하면서, 청년 세대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글로벌 문화 콘텐츠를 향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하는 듯하다. 영화 장면에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나이지리아 핀테크 회사와 티켓 예매 플랫폼 광고로 제작비를 충당했다고 하니, 우리의 역할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 한·아프리카 협력은 고등교육과 미디어 콘텐츠 제작·기획으로 구체화 되기를 기대해본다. 한국은 이미 글로벌 콘텐츠 시장을 선도하는 나라다. 그 역량에 걸맞게 협력의 무게중심을 ODA에서 '창작 파트너십'으로 옮길 때가 왔다. 아프리카 크리에이터를 위한 영상·기획·스토리텔링 교육, 장학 프로그램, 양국 공동제작협정, 제작인력 상호연수, 배급·플랫폼 협업 등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우리의 경험과 제작 노하우 자체가 아프리카의 신진 창작자들이 갈망하는 자산이 될 수 있다. 나이지리아의 놀리우드는 제작편수 기준 세계최대 규모의 영화시장을 형성하고 있으니, 이들을 시혜의 대상이 아닌 미디어 시장의 협력 동반자로 보는 것이 맞다.

    '내 왕자님은 외계인' 촬영 현장
    '내 왕자님은 외계인' 촬영 현장

    한국인 출연진과 현지 스태프가 촬영 중간 휴식을 취하고 있다. 휴대용 선풍기와 부채, 참치캔과 빵 등이 뒤섞인 문화 교류의 현장이다.[케미 이쿠시둔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쿠시둔 감독은 언젠가 한국을 찾아 한국의 제작진들과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의 바람은 개인적 희망 사항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 대중문화가 길러낸 주도적 콘텐츠 창작은 아프리카 곳곳에서 보내오는 협력의 신호다. 따라서 한국이 보건과 농업의 뒤를 이어 미디어 영역에서 협력에 앞장선다면, 원조를 넘어선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견인하게 될 것이다. 아프리카 알고보면, 그들이 먼저 문화 협력의 길을 내고 있다. 이제 함께 걸을 때이다.

    ※외부 필진 기고는 연합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이은별 교수

    현 한동대 커뮤니케이션학부 조교수, 성균관대 컬처앤테크놀로지융합전공 초빙교수, 한국외대 미디어외교센터 전임 연구원 역임. 에세이 '경계 밖의 아프리카 바라보기, 이제는 마주보기' 외교부 장관상 수상, 저서 '시네 아프리카' 세종도서 선정 및 희관언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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